[소설] 자랏골의 비가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내가 가졌던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할머니가 저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대 차이라 하는, 흔히 말하는 그 것일까?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가, 그리고 우리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것이 그 분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내가 그 분들의 ‘경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아가신 뒤였다. 사전에 등재된 설명으로는 내가 찾는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해의 단초를, 이 자랏골의 슬픈 노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슬픈 노래가 내 삶에 폭풍같이 몰아쳐 나의 귀를 밝혔다.
일제강점기. 내게 화산 같은 분노를 일으키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이란 나라에 한정된 분노였을 뿐, 우리나라에 대한 어떤 슬픈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랏골에 자리한 농민들의 한이 읽히면서, 그 것은 무거운 감정이 되어 나를 둘러쌌다. 그리고 사람을 향한 안타까움과 아픔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삶이었을까? 이런 사람들이 정말 있었을까? 처음에 더디 읽히는 것은 내 호흡이 쉬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랍장에서 박하사탕을 내어주시던, 따뜻한 손의 할아버지가 이런 세상을 지나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강한 억압은 그 안에 있는 것들도 찌그러뜨리기 마련이다.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에서, 동네 사람들끼리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슬픈 노래가 아프게 들렸다. 그 노래들을 부르며 자란 분들이 나의 할아버지들인 것이었다. 지금은 너무 쉬운 말이 자유지만, 그 쉬운 것을 쉽게 누리지 못했던 그 시대에, 사람들이 맞고, 구르고, 죽는 장면에 숨이 가빠졌다. 중학생 때 국사책의 몇 페이지에 불과한 글을 읽어 내려가던 내 모습이 지나갔다. 일본에 대한 분노가 솟긴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잠깐 들린 비명 같은 소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자랏골의 사람들을 통해 들리는 노래는 쉽게 잊을 수 없는 노래였다. 매 맞은 울음과 피 냄새가 진하게 물든 노래가 나를 휘감았다.
아버지께 어릴 적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과거를 되짚어 갈 때 자주 나오는 말은 ‘그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였다. 고향의 정취에 젖은, 아버지의 즐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랏골의 노래는 그 이야기가 웃음 담긴 추억이 아니라 가슴 저린 아픔이고 현실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자랏골의 슬픈 노래를 듣기 전까지 그저 다큐멘터리의 자료 영상과 같은 장면만 내 머리에 넣어 놓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 했지만 긴 시간 자랏골을 짓눌러온 것은 널찍하고 두꺼운 바위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여전히,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 공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찌그러진 고무공에 뜨거운 바람을 불면 다시 펴지는 것처럼, 성장한 의식은 비틀어진 것을 본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 그 억눌린 것을 뚫어내고, 일어난 청년들의 노래가 뻥. 뻥. 하고 불릴 때에는 내 혈관의 피가 들끓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내 안에 일어난 불길을 식히며,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는 쉬운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 세대가 이겨낸 그 시간의 혜택을 누리며 나는 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아프간에서 귀국한 미군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 자살하고 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전쟁처럼 치열했던, 아니 실제 전쟁을 치른 우리 현대사. 그 소용돌이를 헤쳐 오신 분들의 아픔을 만져주고 이해하는 것은 누가 했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라는 질문이 내게 왔다.
자랏골에 울린 비가가 다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각, 이 땅에 다시 슬픈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장검을 차고,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던 사람들은 없지만, 겉모습만 바뀐 채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최근의 부모자식 간의 크고 작은 사건부터, 노인과 젊은 세대 간 대립으로 불거진 사회 문제들까지. 모양은 달라졌고 눈에 보이는 것도 이전과는 다르다.
현재의 축복을 만들어낸 분들에 대해 떠올려보고, 고민해보는 그 시작을 이 자랏골의 비가를 들으며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나의 동생과 친구들이 함께 이 책을 통해 선조들의 세상을 들여다보며 우리 어른들을 좀 더 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에 만연한 이기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은, 이 자랏골에서도 드러나는 공동체 의식이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갈등이 한 순간에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따뜻함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더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의 부어오른 무릎과, 아버지의 뭉친 어깨를 주무르는 일은 정말 나의 몫인 것이다. 이렇게 내 귀를 밝히며 들어온 그 강렬한 것이 흩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기쁨의 노래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날까지.